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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그림자로 비추는 삶 - XXX에게

«231.4㎡+131.82㎡»
XXX (김태희, 윤이도)
갤러리 175
2022.10.21-11.01
 

간난 할머니

할머니의 이름에 호기심이 생긴 것은 얼마 전이다. 할머니는 ‘갓 낳은 아이’라 ‘갓난이’로 부르던 호칭이 그대로 ‘김간난’이라는 이름이 되었다고 하셨다. 사이 간(間) 자에 난초 난(蘭)을 쓰는 당신의 이름이 좋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도 하셨다. 그러나 나의 간난 할머니를 포함해 많은 간난 할머니들의 이름에는 출가외인이라는 명목 하에 딸의 이름을 대충 짓던 시대상이 배어 있다. 비슷한 예로 성만 있고 이름은 없던 여성을 관청에 등록하기 위해 지었던 ‘ㅡ성을 가진 여자’라는 뜻의 ‘성녀’가 있다.1) 김씨 성을 가진 여자라 ‘김성녀((金姓女)’, 박씨 성을 가진 여자라 ‘박성녀(朴姓女)’라는 이름이 붙여진 무수한 여자들은 그 이름으로 할머니가 되었다. 할머니의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애달퍼진 것은 이런 사연을 알게 된 후부터이다.

 

간난이라는 이름을 되뇌며 제대로 된 이름 없이 한 생을 살아온 여자들에 대해 생각했다. 하나씩 담아두기에도 벅찬 개인의 생이 익명으로 불리었던 역사가 못내 먹먹했다. 그럼에도 자꾸만 마음에 남던 이유는 이름 안에 어려 있는 무수한 이야기 때문이다. 김태희와 윤이도는 이 익명의 삶을 호명하기 위해 ‘XXX’라는 팀 명으로 전시 «231.4㎡+131.82㎡»를 꾸렸다. 할머니와 할머니가 살아오신 집, 집을 둘러싼 이야기는 세대의 시차를 부정하지 않은 채 두 작가의 작업을 통해 비춰진다. 익명의 깜깜함 속에 집을 가교로 전해지는 미시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해온 것과 남아있는 것들을 조명한다.

 

 

텃밭과 반딧불의 우화

누군가의 삶이 어떤 장소와 만났을 때 이루어지는 작용은 이름과 삶이 맺는 관계 만큼이나 밀접하다. 생이 특별히 아로새겨지는 장소는 그가 살아온 집이다. 한사람의 수명과 비교했을 때 언뜻 더 긴 생을 가진 듯한 집은 그러나 시간의 흐름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 집에 깃든 개인의 흔적은 그때부터 오로지 기억에 의존한다. 윤이도는 이쑤시개와 먹을 사용한 흑백의 그림을 통해 이 기억을 긴밀히 파고든다. 장지 위에 빈틈 없이 재현된 할머니의 집은 재개발로 인해 터만 남은지 오래다. 그림 속 풍경은 이처럼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것들의 공동(空洞)을 빽빽히 채우고, 기록된 것들을 통해 기록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말한다.

 

윤이도가 돌아가신 할머니의 집과 함께 주목하는 것은 마을 어르신들이 40년 넘게 가꿔온 텃밭이다. 하루 아침에 사라졌으나 그 땅에 속한 이야기는 목소리로, 문장으로, 그림으로 새로이 뿌리 내린다. <수확의 날>(2022) 연작은 이웃 공동체의 손길을 통해 텃밭에서 일구어진 수확물을 담는다. 봄나물과 옥수수, 오이와 애호박은 느리게 쌓여온 시간과 결실을 상징한다. 그 위로 밤하늘을 수놓는 별은 형형이 빛나는 기억과 미광의 목소리를 품는다. “오래된 집은 이윽고 밤을 맞이”하게 되었지만, 윤이도는 지척의 빛을 끊임없이 쫓는다.2) 이때 짊어진 이야기들은 깜빡거리며 점멸하는 반딧불의 빛과도 같다. 반딧불이 소멸하는 이유는 “오로지 관찰자가 그것의 뒤를 쫓기를 포기하는 한 에서일 뿐”이다.3) 전시장의 모서리에 빙 둘러 놓인 그림과 조용히 울리는 인터뷰 속 목소리는 반딧불의 빛을 관측하기에 좋은 장소를 마련한다. 비로소 새와 비행기가 낮게 나는 곳, 발길이 끊이지 않고 연약한 것들이 자라던 곳에서 속삭이는 우화가 들려온다.

 

 

그림자의 시간

할머니와 사이가 돈독한 편임에도 불구하고, 지나온 삶의 결이 항상 단번에 이해되는 것은 아니었다. 할머니와 손녀의 관계가 반드시 애틋함으로만 이루어진 것 또한 아니다. 긴 시간을 사이에 두고 빚어지는 세대의 갈등은 ‘이해할 수 없음’과 오해의 영역을 낳기도 한다. 김태희는 성인이 되고 난 뒤 함께 살아온 할머니의 집을 이해의 매개로 삼는다. 3층짜리 집은 할머니가 자신의 생계를 책임지며 갖춘 건실한 보금자리이자 삶의 의지를 담은 장소, 동시에 재개발로 곧 사라질 장소이다. 작가는 미래가 드리우는 그늘 앞에 할머니의 집에 깃든 수고를 되짚어 보고자 했다. 이러한 태도는 그 생을 살피는 작업적 수행으로 이어진다.

 

일상을 지탱하는 것들은 너무 당연해서 쉽게 눈에 띄지 않곤 한다. 김태희에게는 할머니의 삶을 이룬 것들이 그러했다. <하얀 주름ㅣ옥탑 파사드>(2022)는 생을 지속하는 할머니의 노고를 조적식 벽돌의 틈으로 가시화한다. 집의 벽돌을 견고히 잇는 틈은 실재하는 공간의 얇은 면적을 차지하며 투명하고도 짙은 그림자를 만든다. 광원으로부터 멀어질수록 희미해지는 그림자는 영상 <낮 주름>(2022)에서도 등장하는데, 옥상의 그림자를 따라 촘촘히 수놓아지는 모래알은 이른 아침부터 해가 기우는 시간까지 녹색 바닥을 덮었다가 이내 쓸리고 사라진다.

 

빛을 따라 이동하는 또다른 존재는 바로 할머니가 돌보는 화분이다. 일조량에 맞춰 집의 안팎을 부지런히 오가는 화분은 생의 의지를 다지는 할머니의 모습과 닮아 있다(<이동하는 동그라미>(2022)). 하루를 단위로 집의 곳곳을 누비는 세 작업은 머지않은 때에 사라질 집의 기억을 공고히 한다. 이 집에 대한 사유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할머니가 나와 같은 현재를 살아가는 개인임을 두고두고 기억할 것이다.

 

 

XXX에게

익명의 이름으로 시작한 김태희와 윤이도의 전시는 할머니가 살아온 공간의 면적을 제목으로 한다. 그 합을 훌쩍 뛰어넘는 할머니의 삶에 대한 경의가 전시장 곳곳에 녹아 있다. 과거에 지어진 것에서 출발한 두 작가의 작업이 현재에 새겨진 뒤 앞으로 나아갈 곳이 부디 양지바른 곳이길 바란다. 전시를 보며 내내 맴돌았던 소설 속 구절을 그곳의 XXX에게 바친다.

“나는 희자가 높은 하늘에 연을 띄우듯이, 기억이라는 바람으로 잊고 싶지 않는 순간을 마음에 띄워 올리곤 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 바람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일이 항상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으리라고 짐작하면서.

잠깐만 앉아있자고 했으면서도 우리는 말없이 오래도록 바다와 달과 흰 연을 바라봤다.”4)

1) 송종훈, 「100년 전 `姓女`의 전성시대」, 2021년 9월 29일. http://www.dt.co.kr/contents.html?article_no=2021093002102269061001&ref=naver (2022년 10월 26일 최종 접속)

2) 이번 전시에서 중심을 이루는 작품의 제목이다. 윤이도의 작업 속 시침은 모두 밤을 가리킨다. 윤이도, <오래된 집은 이윽고 밤을 맞이하기로 했다>, 장지에 먹, 126x210cm, 2022.

3)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반딧불의 잔존』, 김홍기 옮김, 길, 2012, p.60.

4) 최은영, 『밝은 밤』, 문학동네, 2021,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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