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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stellation of...

«제 9회 아마도애뉴얼날레 목하진행중»
이도현 x 모희  ​«Constellation»
아마도예술공간
2022.04.22-06.02

 

영화는 이미지를 몸짓의 나라로 데리고 간다. 새뮤얼 베케트가  『밤과 꿈』에서 암묵적으로 제시한 아름다운 정의에 따르면, 영화는 몸짓의 꿈이다. 영화감독의 임무는 각성의 요소를 이 꿈에 도입하는 것이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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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수히 축적된 자본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 삶을 관통한 지 오래다. 매끄럽고 견고한 디지털 인터페이스 속 이미지는 모든 구체적인 경험으로부터 우리의 몸을 소외시킨다. 우리가 가지고 싶은 것, 가져야 하는 것, 우리의 욕망을 선취하는 것들 모두 이미지 안에 있다. 유일무이했던 경험은 언제든 교환 가능한 상품-이미지가 되어 눈앞에 놓인다. 우리는 그 이미지를 응시할 뿐이다. 스마트폰 화면을 더듬고, 눈으로는 모니터 속 이미지를 쫓으며,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는 최소한의 몸짓은 그 반경만큼이나 최소한의 경험만을 수용한다. 

 

   그러나 몸짓이야말로 이 “무의미한 사건들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며, “우리 자신을 가리키는"2) 것이라면, 오늘의 몸짓을 회복할 방법은 없을까? 스크린에 가로막힌 몸짓이 더 이상 아무것도 매개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몸, 몸짓을 통해 세계와 닿을 수밖에 없다. 다시 이미지와 장치로부터 시선을 돌려, 몸짓으로 돌아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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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짓의 안팎에는 저마다의 시간이 달라붙는다. 하나의 동작을 행함에 있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시간, 하나의 몸짓이 반복됨으로써 생성되는 계보는 자연스레 몸짓에 스민다. 요컨대 “몸짓이 역사 속에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역사가 몸짓 속에 있기도” 하다.3) 이도현은 오늘날 사회 속의 몸짓, 오늘날을 함축하는 몸짓을 집요하게 쫓는다. 매체나 매체가 양산하는 이미지 자체에 함몰되지 않고, 그것을 마주하는 신체로 돌아간다. 나아가 디지털 디바이스에 의해 촉발된 몸짓(들)에서 “집단의 군무"4)와 같은 형태를 본다.

 

   두 영상 작업 <This is not a Performance, but wat we believe is in our lives>(2021), <This is not a Performance, but something that capitalism has not captured>(2021) (이하 <This is not a performance…>)는 동결된 상태로 머무르지 않고 변주됨으로써 하나의 성좌를 이루는 몸짓의 시간을 상연한다. 이도현은 먼저 몸짓의 외부에 붙어 있던 부수적인 조건들, 이를테면 상품 이미지와 텍스트 등 광고 영상 속 과장된 요소를 제거한다. 우리의 감각과 경험을 매개하는 미디어, 우리의 욕망을 추동하는 이미지를 소거한 뒤 남는 것은 ‘목적 없는 수단’으로서의 몸짓이다. 즉 일종의 무언극과 같은 형식을 취하는 <This is not a performance…>는 목적을 유예한 “순수 수단”으로서 몸짓의 매개성을 드러낸다.5) 이로부터 어렴풋이 깨닫는 것은 부재하는 사물과 우리의 밀접한 거리, 그로부터 멀어진 너와의 거리, 또는 우리가 유실했던 어떤 감각이다. 그러므로 이 영상은 “퍼포먼스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안에 있다고 믿는 것, 자본주의가 포착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것이다.

 

   한편 영상의 레퍼런스가 되었던 광고의 편집점과 촬영기법은 텍스트를 대체하는 시각언어로 활용된다. 다만 클로즈업 쇼트(close-up shot)를 통해 ‘여기를 보라’고 말하는 영상 속에는 견고한 상품 대신 유연한 몸짓이 자리한다. 이도현은 익숙하고도 낯선 몸짓에 자본주의를 매개하는 스펙터클의 전략을 역접 시킴으로써, 이를 성찰할 수 있는 “사이-공간(in-between-space)을 개방한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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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영상의 시작점으로 돌아가서, 마주 보고 앉은 두 퍼포머의 시선과 몸짓은 따로 떨어진 장면을 맞붙여 놓은 듯 어긋나고 빗나간다. 그런데 계속해서 분절되던 움직임은 어느 순간 일상에 기입된 몸짓이 되고, 서서히 커지는 8박자 사운드에 맞춰 안무화된다. 나아가 독립적인 안무가 듀엣으로 전개되는 지점에서, 몸짓의 내부에 존재하던 내러티브는 외부를 향해 확장된다. 이러한 영상의 흐름은 여러 매체를 경유하며 번안되는 작업의 구조 위에 평행하게 포개어진다. 그러므로 영상의 표면에서 ‘나타내는 것’과 달리 ‘드러나는 것’은 개별 몸짓이 아닌 그것이 전이되는 형식과 구조의 점진적인 변주다. 이는 단순히 몸짓을 재현하기까지의 경위를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몸짓이 계속해서 지나고 있는 현재-미래의 시간을 진행 중인 사태로 드러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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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사물을 대하는 우리의 몸짓, 타인과 나를 매개하는 오늘의 몸짓은 어째서 이런 형태를 띠게 되었나? 이 질문으로부터 상품과 몸짓, 광고와 무언극 사이 어딘가를 가리키던 영상은 또 다른 사이 공간으로 나아간다. 

   매체 철학자 빌렘 플루서(Vilém Flusser)는 몸짓의 구조란 “역사적 우연의 산물"7)임을 역설했다. 이를테면 종이의 “왼쪽 상단 모서리에서 시작해 우측 상단까지 이동하고, 왼쪽으로 되돌아가서 먼저 쓴 줄 바로 아래로 건너뛰는"8) 쓰기의 몸짓은 종이와 만년필의 형태, 글과 문법의 체계 등으로 인해 우연히 형성된 것이다. 몸짓은 이를 가능케 하는 외부 요소들의 우연 속에서 이런저런 모양으로 다듬어진다. 우연의 기제는 이도현의 작업에서도 두 개의 차원에 걸쳐 작동한다. 먼저 디지털 인터페이스를 다루는 몸짓의 형태는 쓰기의 몸짓과 마찬가지로 우연적 결과물이다. 타이핑하고 터치하는 손가락, 커서를 따라 굴러가는 눈동자의 궤적은 마침 이런 방식으로 배열된 키보드 자판과 하필 이런 형태를 갖게 된 디지털 스크린의 만듦새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다음으로 몸짓을 안무화한 뒤 촬영하고 편집하는 작업 과정은 각 단계에서 선택되고 탈락되는 우연의 요소를 내포한다. 영상의 쇼트로 채택된 이미지는 두 차원의 틈, 혹은 몸짓이 옮겨가는 매체 사이에서 진동하는 단위로 이어진다. 여기서 마주치고 어긋나는 것, 증폭되고 축소되는 것, 발견되고 유실되는 것들이 이루는 긴장과 교집합이 영상의 표면 위로 떠오른다.

   그러나 축적된 시간을 통과하여 비로소 신체에 깃든 몸짓을 우연이라는 미지의 영역으로 내몰기엔 아직 이르다. 이도현은 관객으로 하여금 숱한 우연을 목격하게 함으로써, 우연의 반복적 구조를 인지하는 순간 획득되는 필연성을 표지한다. 오늘에 도래한 우리의 몸짓은 우연을 담보로 한 필연의 모습을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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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연이 필연으로 전환되는 인식의 지평에서, 감각은 형식(form)으로, 실재는 허구(fiction)의 자리로 이동한다. 몸짓은 다시금 안무(형식)가, 이를 둘러싼 실제의 요소들은 이야기(허구)가 된다. 그리하여 이도현의 영상은 몸짓-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 자체로 진행 중인 어떤 몸짓-사건이 되기를 자처한다. 

   영상 작업으로부터 파생된 <Constellation>(2022)은 이렇듯 몸짓의 발생 직전과 사후 사이에 산재하는 시간적 층위들, 서로 배반하는 것들의 사이 공간을 하나의 성좌로 잇는다. 각 시간과 공간의 축에 얽힌 사람과 사물, 그들 간에 발생하는 일시적인 사건이 여기저기 점 찍어진다. 비로소 끊임없이 매개되고 맞물리는 사건으로서의 몸짓은 거듭 새로운 변곡점을 맞이한다.

 

   『Constellation Book』은 영상 작품의 스틸컷 및 <Constellation No.1-13>, «제9회 아마도 애뉴얼날레 목하진행중» 전시를 준비하며 작가와 기획자가 나눈 대화를 수록한 책이다. 이는 작품과 작품을 둘러싼 또 다른 상호 관계들을 포괄하며 지연되고 소급된 시간을 발생시킨다. 망설이고 웅크렸던 시간들, 멈추어 돌아보다가도 이내 앞으로 나아갔던 순간들, 함께한 사람들과 그 공간 모두 여기에 있다. 이들을 향한 끝없는 질문과 답이 계속해서 이어지길 바란다. 

1) 조르조 아감벤, 김상운·양창렬 역, 『목적 없는 수단: 정치에 관한 11개의 노트』, 난장, 2009, 67쪽.

2) 빌렘 플루서, 안규철 역, 『몸짓들』, 워크룸프레스, 2018, 101쪽.

3) 위의 책, 96쪽.

 

4) 이도현 작가 인터뷰 中.

5)  아감벤은 「몸짓에 관한 노트(Note Sul gesto)」에서 몸짓을 “소통가능성의 소통”이라 표현하며 몸짓이 “순수 매개성으로서의 인간의 언어활동-안에-있음”을 강조한다. 그는 목적이 되지 않고서도 “끝없이 계속되는 매개 자체”인 몸짓을 가장 잘 드러내는 예로서 무언극(mime)의 사례를 제시한다. “무언극에서 신체의 동작과 행위는 일상의 익숙한 목적으로부터 비롯되었지만, 그 목적에 기여하지 않은 채(혹은 그 목적의 실현을 유예한 채) 신체의 물질성과 표현적 수단으로서의 본성을 동작 또는 어떤 포즈의 지속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조르조 아감벤, 앞의 책, p.69, 215; 김지훈, 「생명정치, 몽타주, 이미지의 잠재성: 조르조 아감벤과 영화」, 『비교문화연구』 49권, 2017, 62쪽. 

 

6) 김지훈, 위의 글, 83쪽.

 

7) 빌렘 플루서, 앞의 책, 32쪽.

 

8) 빌렘 플루서, 앞의 책, 같은 쪽.

Constellation Book_페이지_01.jpg

*본 글은  «제 9회 아마도애뉴얼날레» 전시의 일환으로 제작된 기획자 모희와 작가 이도현의 책 『Constellation Book』에 수록되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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