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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주 개인전 
«Shape of Love» 전시서문

«Shape of Love»
전시공간
2022.10.14-11.10

 

 

  어떤 글이 듣는 일로부터 시작하듯 어떤 그림은 바라보는 일에서 시작합니다. ‘어떤 그림’ 뒤에 아무렇지 않게 ‘여전히’라는 단어를 쓰다가, 지금은 무언가를 그저 바라보는 기회가 더 귀하다는 생각에 황급히 지웠어요. 우리는 어느 때보다 많은 것을 보며 살아가지만, 그만큼 한 가지를 오래 들여다볼 시간은 빼앗겼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수많은 자극으로부터 멀어진 채 가만히 지켜보는 시간을 사수하고자 노력해요. 이를테면 전시장에서, 선물 받은 책을 읽을 때, 사진보다 마음에 담고 싶은 순간이 왔을 때. 손쉽게 저장하고 꺼내 볼 수 있는 것보다 어렵게 기억하더라도 꼭 제대로 보고 싶은 무언가를 마주할 때이지요.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여기서는 ‘여전히’라는 말을 쓰고 싶어요) 그런 태도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사실을 얼마 전 작가님과 나눈 대화를 통해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 마음은 어떻게든 전달된다는 것도요.

 

  시선이 가진 힘은 참 묘해요. 작년에 보았던 작가님의 그림은 미세한 빛의 입자를 먼 우주의 별에 겹쳐보는 듯한 풍경을 담아냈습니다. 그 그림을 바라보고 있자면 풍경이 아득하게 다가오다가도 이내 그 속에 몸을 풍덩 담그고 마는 기분이 들었어요. 너무 가까운 것과 닿을 수 없는 것 사이의 거리를 평면 위에 단축해 놓은 것 처럼요. 그 위에 놓여져 있던 작가님의 촘촘한 시선을 기억해요.

 

  이번 전시는 빛을 관찰하던 시선을 물의 크고 작은 결 위에 비춰본 그림들로 이루어져 있어요.예전 그림들이 풍경과 입자의 가깝고도 먼 거리를 감각케 했다면, 최근의 작업은 바라봄이 지속되는 시간을 공유하도록 만들어요. 작가님이 바라본 물에는 특정한 시간이 깃들어 있습니다. 노을이 물들인 노란색과 보라색의 물빛, 밤의 깜깜함 속에 맺힌 물의 일렁임들이 그렇고, 방울졌다가 이내 흩어지고 마는, 새로이 덩이지는 물결이 그렇지요. 저는 물처럼 변화무쌍한 대상을 담담히 바라보는 작가님의 시선에서 알 수 없는 믿음을 느껴요.

 

  무엇보다 오래도록 바라본 뒤 매만져진 그림은 보는 이를 오래 붙잡아 두는 법인가 봅니다. 작가님은 이 바라봄이 어떤 동력과 같은 것이라 말씀 하셨어요. 그리고 이런 힘이 바로 사랑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도 하셨지요. 저는 작가님의 말에 단번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어요. 사랑은 너와 나, 혹은 그것과 나 안에 속한 것이 아니라 둘 사이에 놓여있는 무엇이라 생각하거든요. 시선과 사랑이 가진 공통점은 바로 이런 속성일 거예요. 무엇과 무엇 사이에서 모양을 달리하며, 적당한 거리와 밀도를 지닌 마음. 그러니까 바르트가 말한 사랑처럼, 시선은 물론 작가님의 조형언어와 연결되어 있지만 그 안에 ‘머무를’ 수는 없어요.1) 머무르지 않고 흐르는 것, 그 정해지지 않은 시작과 끝을 끊임없이 쫓는 시선을 사랑이라 부르지 않으면 무어라 부를까요?

 

  바라보는 눈과 그림을 그리는 눈, 그림을 바라보는 눈의 마주침을 상상해요. 사랑이 지속되는 시간보다 더 긴 바라봄을. 눈과 눈 사이의 시차는 서로 다른 투명한 부피를 발생시켜요. 그 투명함을 가운데에 두고, 얇은 층의 물감들은 잠시 땅에 닿았다가 녹는 눈처럼 쌓입니다. 각자의 농도로 채워진 틈, 반짝이는 무언가를 따라가면서요.

 

  전시 <Shape of Love>는 어딘가에 비춰보았을 때 비로소 생경하게 다가오는 투명함을 조용히 드러내요. 잔잔히 흘러가다가 파도처럼 높이 부서지고 흩날리는 입자들, 다시 고요해진 수면 위를 닮은 모습으로요. 제가 좋아하던 가수는 사랑이 물과 같이 높은 곳에서 흐른다고 노래했어요. 사랑의 고도를 한껏 높여 더 아래로 흘려 보내는 작가님의 그림을 생각하며 짧은 글을 마칩니다. 앞으로 맞이할 긴긴 추위에도 사랑이 시들지 않도록.

1) 롤랑 바르트, 김희영 역, 『사랑의 단상』, 동문선, 2004, 1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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