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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회 아마도애뉴얼날레 목하진행중»

이도현 X 모희  «Constellation» 기획
아마도예술공간
2022.04.22-06.02

✴︎

몸짓은 삶과 예술, 현실태와 잠재태, 일반과 특수, 텍스트와 상연이 마주치는 이 교차점을 가리키는 이름이다.1)

 

0.

   태초에 몸짓이 있었다. 말보다 먼저 획득한 몸의 언어는 우리가 갈망하는 무언가를 나타내고, 부연하고, 가리키도록 했다. 팔을 뻗어 손가락 끝이 가닿는 직선의 거리에는 항상 구체적인 대상이 있었다. 이것과 저것, 너와 나. 몸짓으로 하여금 우리의 살(flesh)과 맞닿는 무언가는 또 다른 누군가의 살, 혹은 우리가 지시하는 이것과 저것의 피부였다. 부드럽거나 거친 것, 무르고 연한 것들과 끝없이 부딪히고 맞물리는 곳에서 몸짓은 탄생했다.

 

1.

   오늘의 몸짓은 어떠한가? 이제 우리는 모든 구체적인 것들로부터 거리를 둔다. 우리의 시선과 몸이 향하는 곳에는 언제나 납작하게 눌린 이미지가 있다. 그 자체로 “행해질 것을 선취”2)했던 몸짓은 점차 간결하고 추상적인 움직임이 되었다. 손에 쥔 스마트폰, 매일 바라보는 모니터의 매끄러운 스크린은 멀거나 가까운 거리, 빠르거나 더딘 속도를 하나의 단위로 축소시킨다. 이도현은 이 단위를 일종의 응축된 제스처로 읽어내며 디지털 매체 환경이 자아낸 오늘의 몸짓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또한 이를 통해 생성된 사회적 합의를 읽어낸다. 눈부신 광고 속 새로이 욕망하는 사물의 자리는 비워내고, 그것을 다루는 몸, 그것과 몸 사이의 마주 봄에서 발현되는 감각에 주목한다. 장치의 이면으로 도치되었던 감각은 서로 다른 몸과 매체를 경유하며 거듭 증폭된다. 비로소 이것과 저것, 너와 나 사이 끊임없는 낙차가 발생하는 때에, 몸짓은 계속해서 ‘진행 중인 사건’으로 우리 앞에 놓인다. ‘Constellation(별자리, 성좌)’은 이 주체들의 자리바꿈을 은유하는 메타포로서, 본 전시의 구심점으로 기능한다. 

 

2. 

   첫 번째 방에 걸린 네 점의 사진(<Motion sensor>, <Gesture>(2022) 연작)은 두 쌍을 이루는 이면화(diptych)의 형식을 취한다. 움직임을 담지하는 ‘모션 센서’는 기능을 상실한 사물로, 센서가 인식하지 못한 ‘몸짓’은 옅은 동력을 지닌 흔적으로 나란히 제시된다. 둘은 무언가 일어나기 직전의 망설임이자 끝내 도달하지 못할 종착지를 암시하며 서로의 바깥을 가리킨다. 각자의 가능성과 한계로부터 비롯된 역학은 두 지점 사이를 왕복하는 진자 운동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그래서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는 ‘텅 빈 서판(tabula rosa)’으로서의 사진은 잠재적인 공유지를 마련한다. 이도현은 기계와 신체에 깃든 잠재성을 실증하기보다, 그들 사이의 빈 공간을 “차후에 있을 역량”3)이 해방되는 지대로서 작동시킨다. 전시는 이 가능태로서의 사진-이미지를 짊어지고, 사물과 주체가 마주치고 엇갈리는 교차점으로 향한다.

   마지막 방에서 연속으로 재생되는 두 영상 작업 <This is not a performance, but what we believe is in our lives.>(2021), <This is not a performance, but something that capitalism has not captured.>(2021)는 언어로부터 해방된 무대 위에 일상의 산재된 몸짓을 그러모은다. 욕망을 추동하는 상품과 감정, 내러티브와 텍스트가 소거된 뒤 남는 것은 두 퍼포머의 몸짓과 그것이 이루는 유동적인 궤적이다. 디지털 디바이스를 두드리고 매만지는 손짓, 맞은편 상대가 아닌 화면을 응시하는 눈짓, 무의식적으로 바꿔 취하는 포즈는 그 공동의 목적에 기여하지 않으면서도 “매개성의 범위를 벗어나는 수단”으로 드러난다.4) 관객은 어긋나고 빗나가던 두 몸짓이 하나의 듀엣으로 나아가는 사건을 목도하며, 유실된 사물과 나의 거리, 스크린 속 신체와 나의 거리, 나와 너의 거리를 낯설게 바라보게 된다. 요컨대 이도현은 허구의 상황을 통해‘목적 없는 수단’으로서의 몸짓을 오롯이 담아내며, 그 안팎에 달라붙어 있던 것들을 인식케 한다. 실재하는 현상을 단번에 채집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 몸짓을 안무화하고 촬영한 뒤 수차례 편집을 거치는, 여러 번의 번안을 통해 그렇게 한다.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각 단계의 오차와 오류를 수용하는 과정이 수반된다. 그리하여 견고한 이미지로 축적된 자본을 “또 다른 견고한 목적으로” 대체하는 대신, “길을 잃고, 우연한 마주침에서 생성되는 우연들을 긍정” 하며, “끊임없는 새로운 생성을 통해 흐르고 미끄러지고 스며드는” 사유를 일으킨다.5) 다시금 본래의 목적에 기여하지 않음으로써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를 취하는 몸짓은 새로운 잠재성의 층위로 떠오른다. 이 이율배반적인 관계는 사진과 영상, 전시 전체의 구조에서 동일한 힘으로 작용한다. 

 

0’ 

   영상 작업에서 파생된 <Constellation>(2022)은 작품의 안쪽과 바깥에 개입하는 모든 사물과 주체의 상호 관계를 가시화한다. 카메라의 위치와 방향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영화의 플로어 플랜(floor plan)을 연상시키지만, 영상의 제작 과정을 역추적한 기록물이라는 점에서 변별점을 지닌다. 이 위에는 작업의 실마리가 되었던 발상부터 카메라 렌즈와 조명의 세팅, 안무가와 작가 간의 대화까지, 사람과 사물 사이 발생했던 크고 작은 사건들이 상연된다. 이도현은 이 주체들의 자리바꿈 속에서 빚어지는 구체적인 모양을 성좌와 같은 형태로 기록한다. 

 

   영상 작품의 스틸 컷 및 <Constellation No.1-13>, «제9회 아마도애뉴얼날레 목하진행중» 전시를 준비하며 작가와 기획자가 나눈 대화를 수록한  『Constellation Book』(2022)은 개별 요소 간의 소통 가능성을 전시 바깥으로 한 번 더 확장한다. 오고 가는 질문과 답, 접히고 펼쳐지는 텍스트와 이미지는 책이라는 물성 안에서 지연되거나 소급된 시간적 층위를 포괄한다. 마침표가 아닌 쉼표로 점 찍어지는 문장 위에서, 이런저런 몸짓과 대화의 호흡은 이내 포개어진다. 하나의 몸, 하나의 사물이 아닌 몸과 몸, 사물과 사물, 몸과 사물이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를 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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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르조 아감벤, 김상운·양창렬 역, 『목적 없는 수단: 정치에 관한 11개의 노트』, 난장, 2009, 89쪽.
 

2) 빌렘 플루서, 안규철 역, 『몸짓들』 , 워크룸프레스, 2018, 101쪽.
 

3) 조르조 아감벤, 앞의 책, 같은 쪽.
 

4) 아감벤은 「몸짓에 관한 노트(Note sul gesto)」에서 몸짓을 ‘행위’, ‘제작’과 구분하며 “목적과 수단 사이의 거짓된 양자택일을 깨뜨리는”, “매개성을 전시하며 수단을 그 자체로 보이게 만드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몸짓의 예로 ‘무언극(mime)’을 언급한다. “무언극은 목적 없는 순수 수단이 전시하는 몸짓의 매개성을 가장 분명히 보여준다.” 앞의 책, 69쪽. 

5)  김병선, 『이미지와 기억』, 새물결, 2018, 2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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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조준용

​제공: 아마도예술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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