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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net Htrae Project» 전시리뷰ㆍ서평

«Planet Htrae Project»
상업화랑
2021.10.08-10.31

기획 ㅣ 김명진
참여작가 ㅣ 김은주, 이문영, 조미형/언타이틀플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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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로소 가을이다. 작년 여름 긴 장마와 올해 여름의 폭염을 지나 다시 가을을 맞이한다. 당장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몇 해의 계절을 통과하며, ‘만약’으로 시작하는 가정법의 문장을 수없이 되뇌었다. 만약 앞으로도 이런 지독한 날씨가 계속된다면, 더 끔찍해진다면, 그래서 더는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된다면. 혹은, 만약 어제의 내가 눈앞의 편리함을 취하는 대신 조금의 불편함을 감수했더라면... 도달하지 못한 오늘과 오지 않은 내일을 왕복하며 내내 얼굴을 붉혔다.

  무언가를 가정하는 말은 늘 지양하고 싶은 표현이었다. 전날의 이기심을 향한 죄책이든 훗날의 가능성을 향한 염원이든, 만약은 언제나 내가 이미 잃어버렸거나 내게 아직 없는 것을 환기한다. 『페스트』에서 카뮈는 “우리가 끊임없이 마음속에 지니고 있었던 공동(空洞), 과거로 돌아가고만 싶은, 혹은 그 반대로 시간의 흐름을 재촉하고만 싶은” 이런 감정을 “귀양살이의 감정”이라 썼다. 1) 나는 귀양살이의 감정을 ‘가정법의 감정’이라 바꾸어 말해본다. 기후위기와 바이러스라는 재난 앞에 가정법의 감정은 되도록 빨리, 어떻게든 외면하고 싶은 거북한 감정이다. 지금과 다른 언젠가를 상상하는 것은 오늘의 고통을 더듬는 일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돌아갈 수 없는 그때에 미련을 갖는 것도, 불확실한 그때를 내세우는 것도 모두 부질없는 일이라며 연신 머리를 털어냈다. 그런데 자꾸만 만약을 되풀이하던 여름의 끝자락에, 수많은 ‘만약’으로 가득 찬 소설을 읽었다. ‘만약 우리가 지구를 떠나 외계 행성에 살게 된다면, 만약 그곳에서 외계의 존재와 마주하게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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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이 별을 떠나기로 했어』는 다섯 명의 여성 작가가 쓴 SF 단편 소설집이다. 이 글에서는 그중 두 편의 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박해울, 오정연 작가는 화자의 목소리를 빌려 저마다의 미래 속 만약의 상황을 가정한다. 비가역적 미래를 낳은 숱한 과거를 지나, 아직 도착하지 않은 그날의 시간, 그날의 그곳은 어떤 모습일까? SF 장르가 익숙지 않은 독자로서는 천문학적 가정과 함께 불쑥 호명되는 숫자들이 아득히 느껴지기도 했다. 이를테면 2029년, 1.78광년의 거리, 평균 연령 114세의 양로행성 거주민 등. 내가 살아온 장소와 시간, 나를 지탱하는 신체의 범위를 훨씬 초월하는 크기의 수를 가는 눈으로 짐작해야 했다. 한편 숫자로 치환된 미래 서사의 배경에는 우주가 빼놓지 않고 등장한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넓고도 먼, 풍요롭고도 공허한 대상이 우주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 정복되지 않은 미지의 우주에서 작가적 상상력은 무한히 뻗어 나간다. 촘촘한 과학적 논증으로도 메꿔지지 못한 어느 우주의 빈틈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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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해울 작가의 「요람 행성」은 외계 행성의 폐기물 처리사이자 정화 차량 수리사로 일하는 리진의 이야기를 다룬다. 오로지 지구에 남은 가족을 위해, 외계 행성의 지구화 프로젝트, 즉 테라포밍(Terraforming) 임무를 수행하던 리진은 어느 날 자신이 처리하던 폐기물이 죽은 생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에 빠진다. 급기야 그들이 동족의 장례를 치르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지구화를 멈추는 작업에 착수한다. 하루도 쉬지 않고 정화 차량을 정지시킨다면, 멸종 위기에 놓인 그 생물의 죽음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시간은 30년 뒤로 흘러, 요람 행성에 도착한 리진의 딸 수현은 엄마가 남겨둔 기록과 함께 지구화가 중단되었음을 알리는 스크린 속 글자를 읽는다. 그리고 리진이 들었던 바로 그 생물의 소리, 멀리서 둥둥 울려오는 북소리를 들으며 묻는다. “어떻게 헛된 일을 했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2)

  언어도 생김새도 다른 외계 생물의 얼굴을 리진은 바라본다. 우연히 마주친 뒤 매일 곁을 찾아오는 그들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다. 다만 “그들에게도 그들만의 생이 있었다는 것”을 느낄 뿐이다.3)  오스트리아의 한 정신의학자는 우리가 우리 몸 바깥에 있는 존재와 자신을 일치시키는 능력에 “우주적 감정(cosmic feelings)”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우리 안에 살고있는 전 우주와 우리가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는 우주적 감정이 타고난 인간의 능력이라 믿었다. 4) 어쩌면 리진은 잠자코 마주보던 그 생물의 얼굴 속에서 자신의 얼굴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와 눈을 맞추고,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는 삶의 방식은 지구에서 누렸던 리진의 것과 다르지 않다. 리진이 가정한 만약의 상황, 그 생물을 살릴 수도 있다는 희박한 가능성은 이 우주적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어쩐지 둥둥 울리는 북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지구에서의 미시적 인연은 거시적 우주를 배경으로 맺어지기도 한다. 오정연 작가의 「남십자자리」는 ‘양로행성’으로 이주하여 노년의 삶을 영위하는 해리의 이야기이다. 단조로운 일상을 이어가던 해리는 지구에서 육아도우미로 일하며 돌보았던 미아와 재회한다. 미아는 행성의 휴머노이드를 관리하는 회사의 직원이 되어, 오래도록 그리워하던 할머니를 만나러 온 것이었다. 그러나 곧 해리에게 찾아온 치매 증상을 발견하고, 과거의 기억을 망각시키는 대신 현재를 안정적으로 만들어주는 신기술을 제안한다. 함께 떠난 마지막 여행에서 해리는 칠흑 같은 어둠의 구간인 달의 뒤편을 지나며 약속한다. 만약 미아와의 기억을 까무룩 잊게 되더라도, 먼 옛날 호주의 원주민처럼 별들 사이 유난히 어두운 곳을 이어 별자리를 그리겠다고. 미아가 떠난 뒤 해리는 자신이 택한 집에서 어느 때보다 또렷한 ‘지금’을 살아간다. 그리고 매일 기도한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죽는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5)

해리의 선택을 헤아리며 명료하게 점찍어진 만약의 문장들을 되짚어 본다. 헤아릴 수 없이 먼 거리를 가로질러, 우주적 인연을 이어가는 해리와 미아를 떠올린다. 캄캄한 달의 이면에서 서로의 얼굴을 매만지는 장면은 이 소설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목이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미련과 염원의 말들을 곱씹으며, 가정법의 감정은 사랑의 다른 모양임을 깨닫는다. 만약에, 라는 가정은 별과 별 사이의 거리, 수십 수백 년의 시간을 이리저리 겹쳐 놓는다. 이때 가까스로 맞닿은 교착점에서 다시금 이야기의 가능성이 출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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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의 우주를 다루는 다섯 편의 이야기는 지금의 지구를 생경한 풍경으로 바라보도록 한다. 먼 행성의 땅과 그곳에서 올려다본 하늘을 상상하는 일은 내가 속한 우주를 다르게 바라보는 일과도 같다. 이렇듯 천문학적 상상력과 미적 감정을 포개어놓는 실천을 접할 때면, 어김없이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이라는 제목의 아름다운 사진이 떠오른다. 여기에는 1977년 태양계 탐사를 목적으로 발사된 보이저호(Voyager)와 천문학자 칼 세이건(Carl Sagan)의 흥미로운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는 당시 미국항공우주국(NASA)에 과학적으로 무의미할 뿐 아니라 일견 무모해 보이는 제안을 던진다. ‘만약 보이저호의 카메라를 뒤쪽으로 돌려 지구를 찍어보면 어떨까?‘ 그리고 1990년 2월 14일, 보이저호는 지구로부터 60억km 떨어진 해왕성 궤도 밖에서 한 장의 사진을 보내온다. 사진은 우주의 암흑 속 외롭게 떠 있는 티끌과도 같은 푸른 점이 바로 ’우리‘임을 새삼스레 보여준다.6)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 “우리의 모든 기쁨과 슬픔”, “사랑에 빠진 젊은 연인들,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 희망에 찬 아이들” 모두 이 티끌 위에 살아왔음을 담담히 진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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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2월 나사는 <창백한 푸른 점>의 촬영 30주년을 맞아 디지털 기술로 리마스터한 사진을 공개했다.
햇빛이 산란되어 형성된 밝은 띠 중앙에 자리한 작은 점이 지구이다. (사진 나사 제공)

  칼 세이건의 엉뚱한 가정은 지구가 우주의 작은 점에 불과하다는 구태의연한 사실을, 눈앞의 구체적인 감각으로 포착하게 해주었다. 보이저호를 발사하고 태양계 행성을 탐사하는 일이 과학의 일로 간주된다면, 60억km 멀리서 지구를 돌아보는 일은 인문학과 예술의 일이라 말할 수 있다. 아니 어쩌면 이 둘을 완전히 이분할 수 없다는 데에 천문학의 신비가 있다. 그러므로 해리의 목소리를 빌려 다시 말해본다. 낭랑히 빛나는 별자리가 과학의 것이라면, 그 사이의 어둠을 더듬더듬 이은 암흑의 성좌는 예술에게 허용되는 자리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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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net Htrae Project》는 이러한 예술의 자리를 전시의 형태로 아로새긴다. 가상 행성 ’하트레‘로 가정된 전시장은 세 작가가 기록한 별의 흔적과 이들을 바라보는 미적 감각을 담아낸다. 조미형, 김은주 작가의 반짝이는 씨앗과 캔버스를 지나, 2층을 가득 메운 이문영 작가의 구조물 사이를 몇 바퀴 돌아 나오면 전시장에 작용하는 어떤 힘을 느끼게 된다. 그림과 그림 사이, 구조물과 조각 사이 적당한 장력으로 관객을 밀고 당기는 힘의 균형은 서로에게 무해한 침범을 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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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 조미형, <은하 경작 3, 4, 5>, 캔버스 위에 분채, 유화, 91x116.8cm, 2021.
(오) 조미형, <은하 경작 1>, 철판 위에 혼합 재료(씨앗, 건조식물, 흑연, 분채), 가변크기,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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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 김은주, <Particles of Light>, 캔버스 위에 유화, 130.3x130.3cm, 2021.
(오) 김은주, <Particles of Light>, 캔버스 위에 유화, 90.9x72.7cm, 2021. (each)

  조미형 작가의 <은하 경작> 시리즈는 작은 생명을 향한 관객의 조용한 응시를 이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전시장을 빙 두른 인공 토양은, 지구에서 바라본 은하의 모습과 비슷한 생김새를 갖는다. 작가는 하트레의 땅에 씨앗을 심는 은유적 행위를 통해 식물의 안팎에 깃들어 있는 조형성을 드러낸다. 작은 광물을 닮은 씨앗은 멀리 날아가기에도, 흙 알갱이 사이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기에도 알맞은 크기와 무게, 형태를 지녔다. 동그랗고 파란 원 안에, 네모난 캔버스 안에 빼곡히 수놓아진 형형색색의 씨앗들은 낯선 행성의 땅과 지구의 밤하늘 사이를 오가는 자연의 가능태로서 전시장에 놓인다.

  한편 김은주 작가의 회화(<Particles of Light>)는 관객을 캔버스의 표면 앞으로 가까이 끌어당긴다. 이 표면에는 주변의 사물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스며있는데, 그 대상은 주로 별과 같이 반짝이거나, 반짝인다고 생각되는 무언가이다. 다정하고 정직한 시선의 파장은 손에 쥔 붓으로, 이어 납작한 평면 위로 자리를 옮기며 물리적인 대상의 형상과 한데 엉킨다. 이때 화면에 놓인 크고 작은 점과 면들은 단순한 물질(입자)의 형상이 아니라, 이를 면밀히 살피는 작가의 시선(파동)과 응결된 빛과 같은 어떤 것이 된다. 관객은 그 빛의 관측자로서, 작가가 바라보는 세계의 단면을 공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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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영, <여백의 일기>, 각목, 합판, 스티로폼, pvc, 종이, 조명, 철사, 점토, 가변설치, 2021.

  그렇다면 하트레 행성이 속한 세계의 이면은 어떤 장력을 작동시킬까. 이문영 작가의 <여백의 일기>는 관객으로 하여금 각자의 작은 궤도를 공회전하도록 만든다. 관객은 구멍 뚫린 구조물의 바닥을 내려보다가, 이내 가운데의 조각을 바라보고, 이쪽에서 가려진 조각을 보기 위해 저쪽으로 갔다가, 광원으로부터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를 좇기도 한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움직임은 구조물의 중심으로부터 멀어져 그 가장자리와 주변을 맴도는 몸짓이다. 중앙의 조명을 구심점으로, 관객은 계속해서 옆으로 비껴가며 공회전한다. 그리고 이 궤도 바깥에서 조우하는 작은 조각은 커다란 움직임의 서사에 실금과도 같은 균열을 일으킨다.

  하트레를 이루는 생명의 시원과 빛의 파장, 불규칙한 궤도와 물질은 이 모두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감각케 한다. 천문학과 예술의 경계, 외계와 지구의 경계는 또다시 흐려진다. ’만약‘에 대한 오해로 시작한 이 글에서, 《Planet Htrae Project》는 아주 작은 입자부터 지구 바깥의 천체까지, 가까이 또 멀리서 바라보는 방식을 보여준다. 이들의 같음과 다름을 탐독할 때, 오해는 이해로, 후회는 다짐으로 이행할 것이다.

지금 우리는 깜깜한 달의 심연 어딘가를 지나는 중이다. 그러니 무엇도 보이지 않는 이 어둠의 궤도에서, 서로의 뺨을 더듬으며 약속하자. 어제와 내일을 유예하는 대신 유일한 우리의 만약을 가정하자. 이제 우리는 먼 가상의 행성에서 지구의 얼굴을 본다.

1)  알베르 카뮈, 김화영 역, 『페스트』, 민음사, 2011, 98쪽.

2)  박해울, 「요람 행성」. 『우리는 이 별을 떠나기로 했어』, 허블, 2021, 111쪽.

3)  위의 글, 101쪽.

4)  알프레드 아들러, 홍혜경 역, 『아들러의 인간이해』, 을유문화사, 2016, 114쪽.

5)  오정연, 「남십자자리」, 『우리는 이 별을 떠나기로 했어』, 허블, 2021, 207쪽.

6)  칼 세이건, 현정준 역, 『창백한 푸른 점』, 사이언스북스, 2001,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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