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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슨히 껴안고 단단히 풀기
ℬ𝒾𝓃𝒹 𝓁𝑜𝑜𝓈𝑒𝓁𝓎 & 𝘓𝘰𝘰𝘴𝘦𝘯 𝘵𝘪𝘨𝘩𝘵𝘭𝘺»

유리 개인전


갤러리인 HQ

2023.9.4-2023.9.24

    침묵의 시대에 사람들은 의사소통을 적게 하기는 커녕 오히려 더 많이 했다, 라고 니콜 크라우스는 썼다. 이때 사용된 최초의 언어는 손짓이었는데, 언어의 손짓과 삶의 손짓에는 아무런 구분이 없었다. “가령, 집을 짓거나 음식을 만드는 노동은 사랑해 혹은 진심이야 하는 뜻을 전하는 손짓 신호에 버금가는 의사 표현이었다.”1) 모든 표현이 고유한 질량으로 전해지는 시대였다. 겪어본 적 없는 이 시대를 그리워하면서, 오늘의 말과 글이 지닌 무게를 가늠해 본다. 우리의 몸에서 떠나 허공에 감도는 언어들. 잠시 그로부터 멀어질 때, 그러니까 말과 글로 전해지지 않는 것들을 붙잡을 때에 마침내 감각하게 되는 것이 있다. 유리는 말의 무능을 탓하기보다 말과 말 사이를 잇는 짧은 간격의 침묵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침묵의 시대가 그랬듯, 그의 회화는 삶을 이루는 풍경과 언어의 경계를 흐린다. 또렷이 쥐어진 말 사이로 새어 나가는 말들, 어룽거리는 단어와 문장들은 유리의 그림 위에서 간신히 연결된다.

 

    이런 연유에서 전시 《느슨히 껴안고 단단히 풀기》는 모호한 정경으로 가득하다. 유리는 문자로 고정된 글과 이미 전해진 말보다 고스란히 남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것들에 관심을 둔다. 이를테면 지금도 한 글자에서 다음 글자 위로 지나가는 시간, 갈수록 흐릿하고 어렴풋해지는 기억, 이것과 저것, 당신과 나 사이의 관계와 같은 것. 이를 그림으로 서술하는 일은 시각 매체로서 회화가 지닌 함축적인 언어를 소화해내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기의로부터 떨어져 나와 부유하는 기표들의 집합은 그림 안에서 그들만의 기호체계와 뉘앙스를 형성한다. 네 개의 칸으로 구획된 <잠깐 스쳐지나간 죽음에게>에서 사물과 풍경은 서로의 관계, 실재하는 대상과의 필연적인 관계를 상실한 채 의미의 생성을 지연시킨다.

 

    그림에 붙여진 제목은 다시금 언어로 돌아가 텍스트와 화면 속 이미지의 틈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제목에는 유독 ‘무게’와 관련된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어떤 사건들의 무게’나 ‘가벼운 위로’, ‘무거운 낱말’과 같은 것이 그렇다. 수식과 별개로 유리의 그림은 어쩐지 한결같이 무거운 그림일 것만 같다. 말이 짊어지지 못한 것들을 대신 짊어지고자 자처하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지와 텍스트 간의 성근 연결은 언제든 비집고 들어오거나 빠져 나갈 수 있는 틈을 마련해 놓는다. 이러한 틈을 시각화한 상징적인 소재로서 ‘주변시’2)는 경계에 있는 것들을 주시하는 작가의 태도에 비유된다(<시선이 닿지 않는 곳을 응시하는 태도로>). 초점에서 빗겨 나가 희미한 형상은 그림의 전면에 등장함으로써 새로운 지위와 시선을 획득한다.

 

     한편 책은 물성을 획득한 언어로, 유리의 회화와 가장 가까운 형태를 지닌 사물일 것이다. 우리의 말들은 책이라는 종이 묶음을 통해 침묵의 시대에서 오늘날에 이르는 이야기를 전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책에 담지 못한 이야기, 차마 적지 못한 말들은 어디로 갈까? 책을 닮은 유리의 그림은 이런 물음에서 시작한다. 그가 아무렇게나 펼쳐 든 책의 낱장은 마침표 없는 문장처럼 하나의 기다란 그림으로 이어진다. 전시와 동명의 제목을 가진 그림에서, 사물은 말의 내용, 즉 책 속의 텍스트 자체보다 소리 내어 읽는 말소리를 닮아 간다. 높낮이가 다른 파동 안에서 밤의 조도를 띤 낱개의 사물은 서로를 <느슨히 껴안고 단단히 풀기>에 이른다. 이 약한 연결은 밤빛이 파고든 사물의 작은 틈새, 이름 부를 수 없이 조용한 침묵 사이로 뭉근히 지속될 테다.

 

    ‘아무 말도 없이 잠잠히 있는 상태’로서의 침묵과 ‘해가 진 뒤 어두워진 때’로서의 밤에는 어딘가 비슷한 구석이 있다. 모두 말과 낮 바깥으로 지나가는 일시적인 상태이자 시간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유리의 그림이 침묵과 밤의 시간에 가 닿고자 하는 것은 영원하지 못하고 잠시 머무르는 것들을 사랑하는 까닭이다. 그의 그림에 담긴 사물의 생은 아마 우리의 시간 보다 길게 주어질 것이다. 이 사실이 왠지 모종의 위안을 준다.

사물들의 고요한 질서 사이에서, 침묵과 밤을 몰아내지 않은 채 그려진 그림이 있다. 말과 빛 없이도 어떻게든 전해지는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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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니콜 크라우스, 민은영 역, 『사랑의 역사』, 문학동네, 2020, p.111.

 

2) 주변시란 시야의 주변부에 대한 시력을 뜻한다. 중심부보다 시력이 나쁘고 색각도 약하지만 약한 빛이나 움직임을 보는 힘은 강하다. 표준국어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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