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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맨숀 Monomansion» 
채우기 - 잇기 - 비우기

김정인 박지수 차현욱
《모노맨숀》
2023.7.2-8.13
​별관
 

 

   전시 《모노맨숀》은 세 작가 – 김정인, 박지수, 차현욱 – 의 작업 세계를 비유한 ‘집’에서 시작됐다. 집은 나와 타의 공간, 나와 밖을 경계 짓는 최소한의 울타리로, 수용적임과 동시에 배타적인 속성을 지닌다. 회화를 다루는 작가들에게 집은 계속해서 돌아가고야 마는 흰 평면이다.  캔버스와 종이의 빈 화면을 구성하는 방식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이들은 채우고, 잇고, 비우는 행위를 통해 집의 질서를 공고히 해왔다. 전시는 이러한 질서를 결속케 하는 한시적인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세 작가의 작업을 들여다 본다.  

 

   집이 사회 속 ‘개인’을 보장하는 가장 작은 단위의 공간이라면, 박지수는 개인(집)과 사회(밖)의 간극이 갖는 낙차에 주목한다. 실체를 가늠하기 어려운 사회와 산재한 개인의 서사는 좁히기 어려운 거리를 지닌다. 그러나 이로부터 비롯된 무력함은 작가의 작업에 일종의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이를테면 위태롭게 서 있는 개인의 위치는 무심코 지나치곤 했던 일상의 감각들로 좌표 지어진다. 집이 있고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서 있는 곳이 바로 내 집이 되는 셈이다.  소유하지 못한 것들은 잠시 외면한 채, 내가 들고 있는 재료로 나의 집을 짓는다. 이 집의 안팎에서, 박지수는 자기고백과도 같은 화면을 망설임 없이 채워 나간다.

 

   김정인은 세계의 빠른 속도에 대항하는 행위로서 회화 작업을 이어왔다. 그의 집-화면은 바깥과 달리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을 고수한다. 바깥은 급변하는 사회 전반, 쉽게 소비되고 버려지는 이미지를 포괄한다. 여기서 발생하는 편린들을 긁어 모아, 그는 파편화된 조각을 이리저리 엮어낸 풍경을 그려왔다.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나무와 별은 화면 안쪽과 바깥을 잇는 모티프로, 이미지가 인위적으로 접합된 것임을 상기하는 한편 서로의 또렷한 연결성을 보여준다. 느린 속도의 연대를 지속하며, 끝끝내 이어지는 것들은 서로의 경계를 조용히 침범한다. ‘잔해가 만든’, ‘잔해가 사수하는 별’은 이들 사이의 연결을 견고히 하며 또다른 연대 서사를 구축한다.

 

   차현욱은 채우기 위해 비워내는 일을 감행해왔다. 그가 행하는 ‘비우기’는 ‘덜어내기’와 정확히 반대 지점에 위치하는데, 비움의 대상이 애초에 덜어낼 것이 없는 백지이기 때문이다. 그는 비우기 위해 쌓고, 쌓기 위해 비워낸다. 이러한 역설은 그림을 그리는 형식에서 비롯되었다. 고체 형태의 물감을 활용해 갈필로 채색한 한지에는 종이의 요철로 인한 여백이 남는다. 이 여백 위에 다시 붓질을 쌓으면서, 작가는 “언제든 변주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이야기”, 즉 타의 것들이 개입할 수 있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불완전한 색면과 불완전한 이야기의 겹침은 ‘낮달이 뜨는 시간’처럼 경계가 불분명한 화면을 형성한다. 그러나 이때의 개입과 불분명함은 결함이 아닌 또다른 가능성으로 작용한다. 낮과 밤의 경계가 이지러지는 시간, 붓이 스친 자리와 여백이 한데 모이는 곳에서 차현욱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집에서 시작한 전시는 집이라는 개념을 전복하고 그 바깥과 경계를 넘나드는 곳으로 이행해간다. 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백색의 사각형을 끊임없이 갱신해 나가야 하는 작가들에게 당연한 일인 듯하다. 나의 집을 직접 세우고, 자신의 속도로 연대하고, 불완전한 것들을 환대하는 이곳에서, 당신의 집은 어디인지 묻는다. 어쩌면 우리는 이웃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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