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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쪽과 바깥의 상상력
풍경을 전개하는 회화  

손효정
2019-2022

 

 

접혔다 펼쳐진 모양의 전개도 

    커다란 창이 있다. 고개를 뻗으면 익숙한 전망이 들어온다. 흐리고 맑음에 따라 가시거리가 달라질 뿐 풍경은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문다. 같은 장소와 같은 거리의 프레임은 그러나 느린 속도로 변화하는 것들의 궤도를 포괄한다. 지루한 풍경은 세상의 질서를 채득하기에 알맞은 자리를 제공하고, 바깥을 향한 시선을 다시 안으로 비춘다. 손효정은 창을 통해 빛의 위치와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 풍경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를 떠올린다. 안과 밖 사이를 투명하게 경계 짓던 창 위에는 이제 겹겹의 레이어가 쌓인다.

 

    손효정에게 그림이란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발을 디딘 채 이곳이 아닌 저곳을 상상하는 일이다. 따라서 붓을 들기 전 이곳의 법칙을 파악하는 일이 선행되어야만 했다. 그가 택한 수단은 양자역학, 불확정성 원리 등의 과학 이론인데, 그것이 가장 정확하고 정교한 창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물리학적 지식을 습득하는 일련의 과정은 그로부터 벗어난 무언가를 보기 위해 올라야 하는 계단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힘을 규명하는 이론은 풍경 너머와 이면의 것들을 상상하기에 적절한 높이의 ‘안쪽’을 다듬어준다. 이윽고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복잡한 것에서 단순한 것으로 치환된 바깥의 풍경은 육면체와 원기둥, 구와 같은 기초 도형의 형태로 캔버스 위에 현현한다. 보이는 것들 사이에 작용하는 보이지 않는 힘처럼, 도형은 광활한 배경 위로 겹쳐지고 조립된 뒤 이내 분해된다. 각자가 이루는 구조는 펼쳐진 전개도처럼 접힌 세계의 흔적을 내포한다.

 

    다만 손효정이 그리고 콜라주하는 전개도에는 순서가 없다. 선과 면을 따라 완성된 형태 또한 가지각색이다. 어디서든 출발하고 도착할 수 있는 평면 위에는 아래-위, 왼쪽과 오른쪽도 없다. 대신 여기저기 흩뿌려진 시간의 파편만이 자리한다.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흐르던 시간의 일방향은 깨어지고 흩어져 그 구분 또한 모호해진다. 습관적으로 옮기던 시선은 이내 분산되어 부분과 궤적만이 화면을 채운다. 이때 서로 다른 도형 간의 접합과 배치는 펼쳐진 전개도를 보여주는 동시에 설계한다.

 

 

날씨와 우주의 상상력

    규칙적인 일과와 예측하기 힘든 사건으로 점철된 일상은 ‘하늘의 두 얼굴’과 닮아 있다. 바로 천문학과 기상학이다. 항상성을 띤 천체의 운동과 변수로서의 날씨는 실제로 우리의 일상에 녹아있다.1)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이는 먼지, 건조한 날이면 일어나는 정전기와 같이, 날짜와 시간, 매일의 온도와 습도는 창밖과 안쪽의 풍경 모두를 조금씩 다른 무엇으로 바꾼다. 손효정은 이처럼 작은 삶의 결부터 그 환경을 조직하는 날씨와 우주의 원리를 상상하며 원자로 이루어진 풍경화를 그린다. 이를테면 ‘빗방울 한 개를 만드는 기계’나 ‘빛의 스틸 컷’을 담은 그림은 이론과 수식이 가진 한계를 시각적 어법으로 메꾼다. 불규칙한 날씨의 단초가 되는 빗방울, 포착하기 어려운 빛의 위치는 확대된 풍경과 장면으로 나뉘어 구성된다. 과학적 지식은 여러 도형의 몸체와 집합체를 획득하며 단수와 복수의 형태로 평면을 점한다. 비로소 물리학적 현상과 시각 언어의 간극을 연결하는 징검다리로서, 상상력은 종이와 캔버스 위에 안착한다.

 

    상상은 빛을 오래 바라본 뒤 남는 잔상처럼 그림 위에 남는다. 날씨와 같이 변화무쌍하지만 늘 어떻게든 감각되는 것, 감각하기엔 멀지만 풍경을 흘러가게 하는 것들이 하나의 평면 위에 포개어진다. 다시, 창밖의 구조와 질서, 움직임과 변화는 안쪽의 구체적인 전개도로 펼쳐진다. 손효정의 그림이 전개하는 풍경은 회화가 ‘세상을 향해 열린 창’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한편 그 작고도 거대한 이면을 상상케 한다. 그의 이야기가 시작된 출발점에는 여러 현상 속 에너지가 있지만, 이미지가 가 닿는 시선의 끝까지 작용하는 힘은 아마도 상상력일 것이다. 회화를 구성하는 풍경, 풍경을 전개하는 회화 속 상상력은 모든 법칙을 뛰어넘어 이곳과 저곳의 차원을 오간다. 손효정의 회화가 닿을 차원 또한 무궁무진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의 회화적 상상력은 창밖을 넘어 바깥으로, 다시 안쪽과 그 너머를 내다본다.

1)  존 더럼 피터스는 천문학이 “지식을 모형을 만드는 것으로 파악”하는 학문이자 “강도 높은 공간적인 상상력을 요구하는 드문 종류의 지식”이라 말한다. 손효정의 그림은 이처럼 “재현에 굶주린” 지식으로서 천문학을 재현한다. 존 더럼 피터스, 이희은 역, 『자연과 미디어』, 컬처룩, 2010, 234-238쪽 참조.

손효정, untitled, oil and collage on canvas, 202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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